루터의 종교 개혁 배경과 성공 원인
1513년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면서, 그는 사치를 심하게 부리기 시작했으며 그가 한 성당으로 행차할 때 이전 교황이 남긴 교황청 재산의 1/4을 쓰기도 했고, 그가 하는 만찬에는 65가지의 요리가 나왔다. 그의 사치 때문에 대부분의 은행에 빚을 지게 되었고,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재건 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에 레오 10세가 선택한 방법은 '면죄부 판매'였다.
면죄부란 쉽게 말해 천국행 티켓이었고, 레오 10세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사면 자신과 자신의 부모님도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고,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 교수 마틴 루터가 격분하여 대학 교회 북문에 고발장을 붙였다. 고발장은 교황청의 타락과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반박문이었고, 이것이 바로 <95개조 반박문>이었다.
이 반박문은 엄청난 인기를 끌며 한달만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이 한장의 고발장은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고, 종교의 자유를 얻으려는 사람들과 기존의 권력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반박문이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오자, 교황과 독일의 황제가 루터를 탄압하려 했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다. 루터는 파문장을 태워버렸고, 계속 도망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청에 불만이 있던 독일의 제후들과 농민들이 그를 도와주었고, 1555년 마침내 그의 신앙은 가톨릭 신앙과 동등하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렇게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새롭게 생긴 기독교를 '신교'라고 한다.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시작된 이유
: 13세기 십자군 전쟁이 끝난 이후 교황과 봉건 영주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영국, 에스파냐, 프랑스는 더이상 봉건제가 아닌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일 왕국으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독일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채 여전히 300개의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따라서 교황청의 힘이 독일로 강력하게 뻗칠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15 세기 당시의 유럽 기독교가 처해있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십자군 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전반적으로 퇴조한 가운데 교황권은 서서히 쇠퇴해가고 군주들의
정치적 세력이 점차 강해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 정치적 성장을 배경으로 당시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였다. 이에 교황청이 반발하자
군대를 몰고 교황청을 점령하고 기존의 교황을 내몰고, 클레멘스 5 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한 다음 아예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 버렸다(1309).
이후 교황들은 70년간 아비뇽에 머물렀으나 그레고리오 11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갈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교황은 다시 로마로 돌아갔지만 1년만에 죽고 새 교황을 선출하였는데
이탈리아인 유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다. 이에 아비뇽에 있던 프랑스 추기경들은 교황선거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클레멘스7 세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여 유럽에는 교황이 2 명이 존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거의 40년 동안이나 2 명의 교황이 존재했고, 한 때는 3명도 있었다. 교황청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황의 실질적 권력의 상실을 가져왔다.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군주들을 매수하거나 특권을 부여한 결과였다.
마침내 교회의 분열은 종식되었지만 교황의 위엄과 권위는 크게 실추되고 말았다
루터가 등장하던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고 있었고 황제는 카를 5 세였다.
카를 5세는 카톨릭을 수호하려는 입장에 있었기에 루터를 파문하려는 교황의 권위가 루터를 위협할 수
있었지만 마침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 3 세가 루터교를 받아들이면서 보호하였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작센의 선제후란 황제 바로 다음가는 세력이기에 자칫 제국이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카를 5세는
제국 내에서 벌어지는 반란과 전쟁으로 관심이 외부로 돌려진 관계로 루터는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제국의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자 이를 견제하기를 원했던 많은 제후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면서 제국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카를 5세는 1548년의 아우부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파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고, 루터교를 믿는 대부분이 제국의 제후들이었던 만큼 내전 수준으로
치닫던 내부의 분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루터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발생하였던 직접적인 원인은 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하나인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주교직을 얻기 위해 지출했던 많은
돈을 다시 회수할 목적으로 면죄부 판매를 시작했고 당시 성 베드로 성당을 짓고 있던 교황청은 재정이
궁한 나머지 이 돈을 반반씩 나누기로 하고 면죄부 판매사업을 허가했다.
면죄부는 그 구입자에게 신에게 지은 죄로 인한 어떤 형벌도 용서해 주는 효력을 지닌 종이문서였다.
이러한 면죄부는 연옥의 교리로부터 그 합당성이 인정되었는데 연옥이란
죽은 사람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최종 심판받아 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장소로서 이 기간 죄인을 고통
속에 가두고 있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면 그가 사망 전에 죄를 고백하여 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그에 따른
죄값은 치러야 했다. 즉 그의 저주가 풀리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그가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죄값은 별개로 치러야 한다. 그가 고백을 하고 지옥을 면하였으므로 이제 그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연옥에서 죄값이 모두 치러진 다음에야 천국행이 가능하다.
그런데 연옥에서의 기간은 고통스러우며 그 죄의 무거움에 길고 짧음이 달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간을 단축하고 고통을 경감시키는 권능이 교회에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망자를 위한 미사이다.
산자들은 죽은 이후 자신에게 미사가 행하여지도록 교회에 미리 돈을 예치해 두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
그리고 바로 면죄부가 있었다.
만일 그가 올바른 면죄부를 소지하였다면 그는 연옥의 불에서 벗어나 바로 천국에 갈 수 있었다.
또한 사망한 그의 친척을 위해서 면죄부를 구입할 수 있었는데 이는 망자가 대기실(연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시간을 단축해준다. 또한 사제들에게도 연옥에 있는 자들을 구출해내는 권능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죽은자가 천국으로 가기 전 자신의 죄값을 고통으로 치러야 하는 이와 같은 연옥의 교리는 무지한
사람들의 공포심을 최대한 활용하여 면죄부 발행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종교개혁: 배경과 루터의 등장 참조).
면죄부 판매행렬이 작센에 들어오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미르틴 루터는 교회문에
유명한 95개조(95 Theses) 공고문을 붙였다.
이 공고문을 통해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정당성은 물론 그 신학적 효력마저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미 면죄부의 합당성 문제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면죄부와 그 효력 등에 대해서 냉소적이었고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표면으로 분출된 것은 바로 루터 때문이며 동시에 그것은 기독교의 저변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터져 나오는 돌출구 였다.
면죄부 판매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던 기독교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결국 루터에 의해 터져 나오게 되었고
이후 유럽사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혁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면죄부가 너무도 일상화되고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했지만 면죄부 자체는 어디까지나 교회에서
인정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이같은 효력은 연옥의 교리로부터 나오게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독교적 구원의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원죄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원죄는 예수의 자기희생적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구원은 단지 인간을 신과 중재하여 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죄는 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푸는데 이처럼 성사를 받음으로써 인간은
죄를 씻게 되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다.
16세기의 로마 교회의 공식적인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죄를 질 수 있고 타락했지만, 인간이 그들의 죄를
보상하고 신의 도움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한 구원은 곧 공덕을 쌓는 일이었다.
이러한 성사는 주로 미사, 성자숭배, 성유물 숭배, 순례, 자선 및 사제에게 고해하는 행위 등이
포함되었다(종교개혁: 배경과 루터의 등장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대리한 지상의 권세가 죄사함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러한 권능이 곧 면죄부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의 죄에 대한 일체의 권세를 가지고 용서와 심판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죄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 면죄부로 인하여 용서된다고 선언한다면 그들의 죄는 더 이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문제되지 않는 깨끗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죄에 대해서 십자가의 구원자에게 사함을 받은 이후에도 실질적 죄사함의 권능이 교황에게
있다는 이론은 루터에게 문제가 있어 보였다.
당시 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의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천국은 보장된 것이다.
다만 쌓인 죄가 많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 그 죄를 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권위는 다름아닌 그리스도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의 방법과 강도를 결정할 수 있는 최고기관으로서 교황청이 모든 권능을 지니고
그러므로 핵심은 교황이 신인가 아닌가의 문제인 것이다.
루터는 교황이라 할지라도 신은 아니며 신의 대리자일 수 있어도 신적 권능의 대리자일 수는 없다고
확신하였다. 이는 당시의 종교적 관행에 비추어 매우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 사건임은 분명하였던 것이다.
잉골슈타트의 교수였던 엑크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콘스탄스 공의회(1414년 - 1418년)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고, 에베소서에 근거하여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주장하였다.[8]
루터와 에크의 논쟁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교황의 기원과 권위에 관한 것. 에크는 교황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교황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권세는 위조문서인 '이시도리안 교령집(Isidorian Decretals)'에 기초하여
세워졌으므로 허위라고 반박하였다.
둘째, 성경의 권위에 관한 것.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도리와 생활의 규범이 되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자고 외쳤다. 반면 에크는 '오직 성경' 사상은 중세 말 현대주의 사조를
따르는 이단들의 주장이라고 지적하며 루터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웠다.
셋째, 연옥에 관한 것. 에크는 연옥사상이 마카비 2서 12장 45절에 나오므로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루터는 마카비서가 성경이 아니라 외경에 불과하다고 하므로 신적인 권위가 없고, 따라서
연옥교리는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넷째, 면죄부와 고해성사. 에크는 면죄부와 고해성사가 교회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교회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고,
오직 성경만이 오류가 없으며, 면죄부와 고해성사는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위키백과-마르틴 루터).
루터는 교황 대신에 오직 성경, 구원은 오직 믿음, 그리고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서 이루어진다는
교리를 확립하였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은헤로써 주어지는 것이어서 인간의
스스로의 죄사함의 권능으로는 결코 죄가 사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죄의 벌을 비껴가게 하기 위해 신과 중재를 한다는 교회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구원을 얻을 수 없었다.
그것은 원죄로 더렵혀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과업이었다.
오직 신의 의지만이 인간에 대한 구원의 대역사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성립되는 초기의 역사적 사실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루터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권능을 어디로부터 찾을 수 있을까 고심하다 바울의 말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었다.
루터는 다락방에서 로마서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의에 관한 개념과 칭의 교리를 발견하였다.
루터의 종교 개혁적 인식은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구절의 재발견이었다.
루터는 지금까지 이 구절을 “율법을 통해 죄인을 위협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복음을 통해 그의 요구와 위협을
더 강화시키는 심판하시는 의”로 이해했다(교회와 신앙-성서로부터 복음 재발견한 루터 참조).
그것이 바로 루터의‘탑의 경험’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바울의 로마서는 다른 의미로 씌여졌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이 귀절은 당시 시대의 루터에게는 그가
원하였던 바로 그것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하나님이 그의 선물인 의를 복음을 통해 계시하시고, 인간은 오직 신앙으로 이 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루터는 이 사실을 통해 복음의 위로를 받게 되고, 그의 영혼이 그렇게 갈망하던
평화를 찾게 되었다. 또한 그는 로마서에서 복음을 통찰하고 로마서를 통해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교회와 신앙-성서로부터 복음 재발견한 루터 참조).
이렇듯 바울의 로마서는 루터에게는 새로운 신앙의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권능을 찾아야 했기에 그는 실제로는
다른 의미일 수도 있는 바울의 사상을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써 개신교의 기본 원리로 삼고
종교개혁의 길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루터의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어느정도 그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하의 글은 다음에서 정리한 것이다. 참조하도록 하자.
‘오직 성서·믿음·은총’의 독 탓에 교회가 죽었다
아멘넷 뉴스-16세기 종교개혁은 미완의 혁명/정신은 계승하되 한계는 극복해야
중세 유럽 기독교를 크게 보자면 서양 그리스 철학적 사유체계와 히브리 종교체계와의 거대한
융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기독교 문명에서 히브리적 정신을 회복하자는
운동으로 볼 수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인문학적 요소들과 철학적 요소들이 배제되었다.
카톨릭과의 대립에서 카톨릭과 구분되는 요소들을 강조하다 보니 이러한 인문학적 요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리적 바탕과 철학적 바탕을 상실하고 다시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교리적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카톨릭과 비슷한 여러 요소들은 교회를 변질시킬 수 있는 독으로 간주되다 보니 이러한 필요
요소들이 모두 배제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통해 카톨릭과 분리되어 나오면서 기독교 문명이라는 유산을 충분히 상속받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으며 나중이라도 이를 재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 채 17 세기의 계몽주의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오히려 계몽중의의 적대자인것처럼 보이게 되었고 사상적 재창조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이후 독단적이고 감성적 부흥에만 의존하는 교리적 기독교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스스로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카톨릭과의 관계 속에 갇히게 됨으로써 개신교는
개혁 당시의 정신을 상실하여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스스로가 목사들의 특권을 강조하여 비난하던 성직주의로 돌아갔으며 부루주아 정신의
중산층 종교에 안주하여 내부적으로 개혁주의적 요소를 상실하게 되었다.
더욱이 개신교 신학의 기본이 되는 바울의 교리 자체를 루터가 잘못 이해한 까닭에 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의 문제점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신학적 바탕을 바울로부터 찾음으로써 스스로
신학적 모순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사실로부터 죽음의 이유에 대한 신앙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는 기존의 바울
신학으로 해석하면서 사실상 개혁은 시작부터 그 한계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완의 개혁으로 불리운다.
종교개혁의 성서적 맥은 되찾았지만 인문학적 요소를 잃고 자본주의에 침몰하고 성직자 중심이
된 기독교를 개혁하므로써 루터의 종교개혁 그 정신은 계승하되 한계는 극복하자는 논리이다.
오늘날 개신교에는 기독교 문화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교파도 있는 것 같으며 주로 영국의
성공회를 예로 든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발간한 책자에 따르면, 성공회를 다른 교단과
연관지어서 '개혁된 가톨릭', '교황 없는 천주교', '교리에 너그러운 정교회', '가톨릭 전통을 유지하는 개신교'
등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도 있다고 한다.
◆ 루터의 종교개혁 성공 한 원인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로마가톨릭의 면죄부판매를 비롯한 세속적인 모습을 비판하며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는 당시 절대권력이었던 로마 교황청에 대한 도전이요 반역이었지만, “죄는 금전으로써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써 사하여지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독일 민중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결국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돼 유럽 전체의 변화를 가져왔다. 어느덧 내년이면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이 된다.
루터의 종교 개혁이 성공한 원인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둘째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달이다. 인쇄술 발달로 95개조 반박문과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이 널리 퍼졌다.
셋째는 10년 전부터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로마 교황청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넷째는 무슬림과의 전쟁이 계속 되었다.
다섯째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이후에 5년 동안 교황이 3번이나 바뀌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아쉬움은 영주들을 등에 없고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농민층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특권층 비호세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신앙 아카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슬람 종교와 언론 출판의 자유 (0) | 2017.03.06 |
---|---|
칼빈주의의 문제점 (0) | 2017.03.05 |
알미니안주의 5대교리와 위험성 (0) | 2017.03.05 |
칼빈주의 5대 교리 (0) | 2017.03.05 |
[선교소식] 선교사들에게 현지언어를 가르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 (0) | 2017.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