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1년 6개월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행18:11)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거의 대부분(약 4분의 3)의 기간 동안을 고린도 전도에 투자를 했던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네 파로 나뉘어져서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게바파다. 그리스도파다.’해서 서로 자기들이 정통성이 있다고 하면서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거예요.(고전1:12)
고린도 교회는 기독교 초창기에 시작된 교회였기 때문에 신앙적으로도 그렇고, 신학적으로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고,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써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를 놓고서도 남녀 간에 말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성찬식을 할 때에도 누구는 많이 먹고 누구는 남들이 다 먹고 나서 먹을 것이 없어서 시험이 들고 그랬다는 거예요.
교회가 시끄러우려니까 별 일들이 다 많았어요.
어떻게 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요.
우리 교회는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만날 만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고, 다 동네 사람들이니까 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마는 고린도 교회와 같은 경우는 상황이 달랐거든요.
당시의 고린도 교회는 지중해 지방의 해상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늘 사람들의 출입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별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던 거예요.
요즘은 워낙 다양성의 사회이니까 서로 서로 개성을 존중해 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마는 2천 년 전에는 그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그런 사회였기 때문에 늘 교회가 시끄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하는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어디 부자 동네에 가 보면 개들도 만원자리를 물고 다닌다고 하던데,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나 봐요.
동네 강아지들도 방언을 하고 다닐 정도로 하여튼 그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아주 다양하고도 흔하게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사를 사용하는 그 사람들에게 있었던 거예요.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서로 자기 잘났다고 자랑을 하질 않나, ‘네 은사가 더 좋으냐? 내 은사가 더 좋으냐?’고 하면서 서로 서로 잘났다고 떠들어대고 말이죠.
교회는 그저 조용한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은사가 충만하고 별별 희한한 기적들이 교회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교회가 늘 시끄럽고 어지러우면 그거 별로 좋은 거 아니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 33절 말씀에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은사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조용히 각자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거예요.
돈이 많은 사람도 돈이 없는 사람도 교회 안에서는 똑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나 특별한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나 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거예요.
남들 보고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내가 남들보다 더 잘났다고 우쭐대서도 안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 중에서 특별히 성령의 은사 문제를 가지고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에 걸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은사라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사라는 것은 한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별별 은사들이 다 있어도 그 나름대로 통일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을 가지고서 서로 서로 약한 성도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 질서를 따라야 되고요, 목회자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목회자의 지도를 잘 받아야 되는 겁니다.
특별히 우리 장로교 교인들은 은사에 대해서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순복음 쪽 교인들은 그저 모이기만 하면 ‘우다다 우다다…’그러면서 다들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고 난리들이거든요.
지금은 우리 장로교 교인들도 방언도 하고 통성으로 크게 소리 내서 기도도 하고 그렇습니다마는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소리 내서 기도하면 왠지 티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외식하는 것 같기도 해서 조용히 기도를 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방언같은 건 구경도 못했었습니다.
혹시라도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다가 방언을 받아도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티를 내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너무 몰랐던 거죠.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한방 공부도 하시고 양방 공부도 하신 의학 박사님이라는데,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집회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들려오는 말을 들어보니까 말씀을 2시간씩이나 전한다는 거예요.
신대원도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무슨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에요.
단지 의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각 사람들마다 정확하게 병을 집어내고 처방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침술을 하던지 몸에 어디가 안 좋은지 지적을 해 주고 그에 따른 처방을 해 주면 되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으면 목사 안수를 받았어야죠.
자기 직분이 장로이고, 자기가 공부한 것이 양방과 한방이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바로 그와 비슷한 경우였거든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29절과 30절 말씀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그러면서 31절 말씀에 뭐라고 그랬어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할렐루야!)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무슨 장이라고 그럽니까? -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은 그냥 ‘사랑장’이 아니라, ‘사랑의 은사장’이라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아요.
이왕이면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을 때, 그냥 줄줄 읽을 것이 아니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읽으면 보다 그 뜻이 명확하게 들어오게 됩니다.
첫 번째 부분은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한번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다 같이 읽어 보실까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 저를 보세요!
첫 번째 부분에서는 방언이나 예언이나 지식이나 믿음이나 남을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들이 다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하고 대단한 것들이지만, 뭐예요?
무엇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내게 아무 유익도 없다는 겁니다.(믿습니까?)
몇 주 전에 아이티에서 지진이 있었잖아요?
얼마나 가난한 나라였는지 황토 흙에다가 설탕 조금 놓고, 버터 조금 넣어서 그걸 구어서 과자라고 만들어 먹는 그런 나라랍니다.
그 나라에 지진이 일어나서 수십만 명이 죽었어요.
워낙 가난한 나라여서 엄청난 재난을 딛고 일어설 힘도 없는 거예요.
거리거리 마다 사람 죽은 시체들이 쌓여 있어도 이걸 어떻게 갖다 묻을 수도 없어서 그냥 사람 시체들을 쌓아 놓고 불을 질러 버린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우리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교단에서는 오늘 주일 헌금을 아이티 구호 헌금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했는데요.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벌써 개인적으로 성금을 보내신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또 어떤 분들은 ARS 전화로 성금을 보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아무리 집을 팔고 땅을 다 팔아서 거기에 보내준다고 해도 무엇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어떤 사랑이겠어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돈이야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을 보내주어야 됩니다.
두 번째 부분을 또 읽어 보겠습니다.
4절부터 7절 말씀까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첫 번째 부분에서는 내가 이런 저런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리고 내게 엄청난 믿음이 있다고 해도, 내가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구제를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고요,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렇다고 한다면 사랑이란 무엇이냐고 하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거예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도 않고, 무례히 행치도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불의를 기뻐하지도 않고,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내는 것이다.
결혼 주례를 할 때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죠?
옛날에 덕산교회 이호준 목사님께서 사모님에게 청혼을 했더니, 다이아 반지를 사줄 거냐고 그러시더래요.
그래서 얼른 사줄 거라고 그랬다나요?
그리고는 사주긴 뭘 사줘요. 그리고는 그만이죠.
남자들은 그냥 ‘사 줄게. 사 줄게.’ 그러면서 한 평생 사는 거예요.
그렇게 몇 십 년을 살다 보면 그새 잊어버리기도 하고요, 나중에는 정말 사준다고 해도 펄쩍 뜁니다.
결혼하고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록 다이아 반지 타령이나 하고 있으면 그 여자는 정신 나간 여자죠, 안 그래요?
사랑은 다이아 반지가 아닙니다.
사랑은 모피 코트가 아니예요.
그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한 거예요.
사랑은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하지도 않은 겁니다.l
특별히 가까운 사이 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사랑은 무례히 행치도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불의를 기뻐하지도 않고,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8절부터 12절까지 말씀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말씀했습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그리고 방언 통역의 은사, 모두 아홉 가지의 은사들을 언급하면서 이런 것들이 정말 대단한 것들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왜 아무 것도 아닐까요?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오시고 나면 이런 것들은 지푸라기만도 못한 것들이 되고 만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은 잘 알 수가 없어서 마치 거울로 보는 것 처럼 희미하지만, 나중에 주님께서 오시고 나면 그때에는 정말 모든 것이 명확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거울은 정말 좋은데요, 2천 년 전에 바울 선생이 고린도전서를 쓸 그 당시만 해도 거울이라는 것이 대부분 구리거울이었습니다.
구리를 맨질맨질하게 닦아서 광을 내면 거기에 얼굴이 비쳐지는데, 지금 거울에 비하면 오죽했겠어요?
우리가 은사를 행하면서 정말 대단한 것처럼 행세도 하고 잘난 척을 하는데 그거 나중에 주님께서 오시고 나면 별 거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구리거울에 제 얼굴을 들여다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그게 뭐예요? 더욱 큰 은사가 뭡니까? 사랑이란 말입니다.(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그러잖아요?
정치인들이 국민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말이야 쉽죠?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어쩌면 그 사람들은 얼마든지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걸 뭉뚱그려서 대충 그렇게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나를 사랑 하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대신 죽어 주신 정말 놀라운 사랑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의 사랑은 바로 그 사랑을 말씀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하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 먹어서 에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어도 우리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덮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씀하신 거 아니겠어요?(벧전4:8)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사랑을 다 이룬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묻은 그 십자가의 사랑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율법의 완성이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13:10)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제일 마지막 절에 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뭐라고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을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다 같이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찬양을 부르시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 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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