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 사순절주일설교
제목 : 어리석은 인생의 대명사, 빌라도
말씀 : 눅23:18-25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첫 번째는 예수님이겠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야기 잘 안 될 정도로 예수님의 이름을 많이 언급합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많이 나오는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 바울? 그보다는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이라고 여겨집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원어명으로는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인데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때에 A.D.26년~36년까지 초기 로마 제국 시대 유대 지방의 로마 총독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성격이 잔인해서 유대인들을 많이 탄압하였으며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와서 고소하였을 때 무죄인 것을 알면서도 민중의 강요에 굴복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던 사람입니다. 후에 이 사람은 사마리아인들의 학살사건 때문에 로마로 소환된 후에 자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초기 기독교부터 지금까지 아니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여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가장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계속해서 오르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1.끝까지 진리 편에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것을 알고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오늘 20절, 22절을 보겠습니다. 20절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2절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즐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도리어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시기로 자기에게 고소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막15:10절에서는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으로 고소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마땅히 예수님을 벌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요구를 따라 사형언도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로마정부의 파송을 받아 유대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통치자로서 예수님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적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공명정대하고 결정을 해야 할 최고 결정권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한다해도 죄가 없음을 알았으므로 끝까지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키고 도리어 예수님을 고소하는 자들을 무고죄로 감옥에 가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웃기게도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며 모든 책임을 백성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기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면 발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 백성들만의 죄입니까? 자기가 얼마든지 석방할 수 있었는데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십자가 처형의 결정을 해놓고 자기는 죄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오히려 최고 결정권자였던 빌라도가 죄가 훨씬 더 무거웠던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한가지 연상되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어리석은 사울왕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시키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사무엘의 지시를 따라 아말렉을 치게 되는데 거의 대부분 진멸시켰지만 좋은 것은 남겨둡니다. 나중에 사무엘이 이를 보고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이런 것들을 남겨두었느냐고 책망하자 사울이 변명을 하죠. 나는 실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 진멸하려고 하였지만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좋은 것을 남겨 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뭐라 그럽니까? 하나님께서 번제나 다른 제사를 순종하는 것보다 좋아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지 않습니까?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버렸습니다. 하면서 아주 준엄한 책망을 하지 않습니까?
이 장면에서 또 하나 생각나는게 있는데 바로 아담의 범죄 장면입니다.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자기가 먼저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니까 아담도 냉큼 받아 먹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왜 그랬느냐고 추궁하자 하와는 뱀이 나를 꾀어 먹었다고 하고,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빌라도나 사울이나 아담이나 다 똑같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백성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나는 안 그러려고 하였는데 저 사람이 그래서 그랬다고 남의 핑계를 대며 변명을 하는 것이지요. 빌라도나 사울이나 아담이나 결정권은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결정권을 바르게 의롭게 진리안에서 바르게 사용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악과 타협하고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변명들은 하나님 앞에 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후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고, 빌라도도 결국 로마로 송환되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고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의 대명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옳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너 때문에, 세상 때문에,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해도 그런 것들 때문에 악을 선택했다면 결국 악에 속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주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언제 어느 때나 끝까지 진리 편에 섬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명예를 위하여 의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왜 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자시를 지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러분, 막15:15절을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시키면 백성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이므로 공연히 한 사람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비록 죄는 없지만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 사태를 진정시키고 그래서 자신의 자리도 보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악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두가지 죄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는 다수에게 굴복하여 악의 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진리를 팔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공연히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기로 이 사람을 나에게 넘겼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놈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결국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비단 빌라도의 잘못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너무나 쉽게 빠져들기 쉬운 유혹입니다. 정말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고 말씀으로 진리로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자칫하면 우리도 이런 덫에 걸려들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냐 의냐 선이냐 말씀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판단 기분이 되어야 하는데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것, 당장 눈에 보기에 유익이 되는 것에 현혹되어 그 편을 택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말씀과 성령과 은혜와 진리와 선과 거룩으로 채워져 있지 못하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만 마귀의 유혹에 걸려들어 세상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끌려가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유혹많은 세상에서 정말 깨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서 언제 어느 때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편을 택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작은 소리라고 진리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빌라도의 또 하나의 잘못은 그는 진리의 소리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어도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그에게 들려운 진리의 소리를 외면하였다는 것입이다. 여러분, 마 27:19절을 보겠습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하더라.”
즉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 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데 거짓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소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누가 더 힘이 세냐 약하냐, 누가 더 숫자가 많으냐에 따라 결정되는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무조건 다수가 법처럼 되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크고 많은 소리가 진리가 아니라 작고 적은 소리가 진리의 소리일 때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 세계의 종교인의 숫자를 보면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친 기독교인이 23억 5천만명 정도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이슬람으로 16억 3천만명 정도, 힌두교가 9억 8천만명 정도, 불교가 6억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 전 세계의 인구가 71억 3천만명 정도 되니까 다행히 기독교 인구가 1/3로 가장 많긴 하지만 역으로 보면 2/3가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소수인 기독교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도 다수의 사람들은 광야 생활이 너무 힘들자 왜 우리를 이리로 데리고 나왔으냐 애굽에 있을 때는 그래도 고기도 먹고 파와 부추와 마늘도 먹었는데 맨날 만나만 먹고 물도 없고 이게 뭐냐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난리를 쳤습니다. 열두명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도 열명은 우리는 다 죽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가 메뚜기 같다. 차라리 저 모세를 버리고 다른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난리를 쳤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리어 예레미야 선지자를 반역자로 몰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 다수의 소리에 파묻혀가는 진리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따라가도 주님이 아니라 하시면 그 거대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큰 소리냐 작은 소리냐, 다수이냐 소수이냐, 대세이냐 소세이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소수일지라도 진리를 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7: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깨어 기도하며 열심히 말씀 묵상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주님이 주시는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이 시끄럽고 혼탁하고 왜곡된 세상에서 아무리 작은 소리일지라도 언제나 주님편을 택함으로 진리의 생,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 은혜가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양심의 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빌라도의 잘못은 자신의 심령에서 나오는 양심의 쇠를 외면함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하면 그는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이를 묵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22절을 다시 봅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즉 세 번씩이나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지자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하면서 네가 먼저 좋은 것을 선택해서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롯은 냉큼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대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떠납니다.
여러분, 롯이 누굽니까?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동생 하란이 먼저 죽자 조카 롯을 자식처럼 키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아무리 큰아버지가 네가 먼저 좋은 곳을 선택해서 가라고 해도 무슨 말씀입니까? 큰 아버지께서 먼저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큰 아버지가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큰아버지고 뭐고 은혜고 뭐고 냉큼 자기 분에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 떠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다. 마침내는 가정 파탄이 일어납니다.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죽고, 롯의 딸들은 짝을 찾지 못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근친상간을 하게 되고, 그래서 탄생한 민족이 모압과 암몬이고 이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참담한 결과를 나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와 양심과 인륜을 버리고 그저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그저 육신의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그저 육신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자가 아니라 진리의 소리,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좋은 것들, 세상의 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크고 화려한 것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설령 작아보여도 주님이 제시하신 길을 따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영광이냐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 즐거움이나 이런 것을 판단의 준거로 삼지 말고 오직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근거로 삼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된 도도한 물결이 아니라 끝까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하고도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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